예술가, 또 하나의 신이 되다
물감으로 빛과 금의 효과를 낼 때, 화폭의 내부는 철저히 시각적으로 가상이 됩니다. 그림 속의 빛과 금은 진짜가 아니라 물감에 불과한 것이죠. 이로 인해서 실재와 가상, 사물과 기호는 철저히 분리됩니다. 하지만 알베르티가 금의 사용을 무조건 금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림을 장식하는 (액자들 같은) 수공에 있어서는,
예컨대 원주, 프로필이 새겨진 받침돌, 기둥머리, 파사드, 모티프 따위로 장식하는 데는,
설령 순금을 덩어리째 넣어도 를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완벽한 역사화는 진귀한 보석들을 주렁주렁 달아서
치장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폭의 안은 철저히 가상이어야 하기에, 금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화폭 밖으로 나가 장식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중세의 관념은 뒤집어집니다. 중세 예술의 가치가 주로 사용된 재료에서 나왔다면, 르네상스 예술의 가치는 예술가의 솜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심지어 쇠 가운데 가장 천대받는 납덩어리조차
그것이 피디아스나 프락시텔레스 같은 명장의 손길이 스친 것이라면
같은 무게의 은괴보다 더 비싸게 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알베르티는 제욱시스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이 고대의 화가는 '작품이란 값을 매겨 팔 수 없는 것'이라며 자기 작품을 다른 이들에게 거 주었다고 합니다. 이를 알베르티는 '화가는 흡사 전능한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는데, 어떻게 그를 만족시킬 가격이 매겨질 수 있겠느냐는 의미'로 풉니다. 여기서 화가는 마침내 '전능한 신적인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중세의 신본주의와는 다른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입니다.
회화예술에서 대가를 이루는 사람은 그가 남긴 작품이 찬탄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화가 자신도 '또 하나의 신'이라는 평판을 누리게 됩니다.
자연을 넘어선 아름다움, 이상미의 재탄생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일화를 다룬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을 보면 제욱시스가 그린 그림 속의 포도를 향해 달려드는 새의 모습이 보입니다. 정면으로는 그림의 막을 들추려다가 그게 파라시오스가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고 화들짝 놀라는 제욱시스의 모습이 보입니다. 새의 눈을 속인 제욱시스와 그의 눈을 속인 파라시오스의 경쟁에 관한 전설은 회화가 가진 환영주의 효과를 말해줍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회화의 환영주의가 그저 사물을 그대로 그리기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베르티는 화가라면 때로 자연을 수정할 필요도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고대의 화가들은 꾸눈 왕 안티노스를 그릴 때 눈이 멀쩡한 쪽 얼굴의 옆모습만 보이도록' 그렸습니다. 또한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두상이 기형적으로 길쭉했기 때문에 화가나 조각가가 그의 초상을 제작할 때는 한사코 투구를 쓴 모습으로 재현'했다고 합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또한 창술 경기에서 한쪽 눈을 잃은 몬테펠트로 공작을 그릴 때에는 눈이 멀쩡한 쪽이 보이게 초상을 프로필로 처리했습니다.
회화는 실물과 거의 같으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사물이 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욱시스는 크로톤에 헬레나 상을 만들 때에는 그 지방의 가장 아름다운 다섯명의 처녀를 뽑아, 그들의 신체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부분만 골라서 하나의 인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는 회화를 현실의 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운 경지, 즉 이상미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가상'이라는 고전 예술의 원칙입니다. 실물과 거의 똑같은 '가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아름다워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주의 미학은 모사의 생생함만을 선호하는 자연주의와는 구별됩니다. 이미 고대에 자연주의자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고대의 조각가 데메트리오스는 아름답게 빚어내기보다는
재현하려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슷하게 모방하는 일에만 골몰했기 때문에
최고의 찬사를 놓쳐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역사화, 회화의 정점
알베르티는 '화가가 실행하는 최고의 작업이 역사화'이며, 회화 속의 모든 구성은 '역사화의 줄거리를 가르쳐 주는 한가지 목적'에 봉사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사 '역사'는 'istoria'의 역어로, 좁은 의미의 역사(history)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 이야기(story)를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역사화란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야기란 성서나 신화, 또는 역사를 의미합니다. 서양 회화의 제재는 대부분 이 세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중세 예술에서도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다루었지만, 거기서 가장 중요한 의미 작용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재료+처리', 이것이 중세의 창작 공식이었습니다. 알베르티가 역사화를 '최고의 작업'으로 꼽은 것은, 회화를 성서나 신화, 역사와 같은 문학적 텍스트의 시각적 번역으로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르네상스의 창작은 내용+형식, 즉 조형적 표현을 문학적 텍스트에 주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알베르티가 《회화론》3권에서 기하학을 습득하는 것과 더불어 시인이나 수사학자들과 긴밀히 교류하라고 권하는 것도 아마 그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넓은 분야에 많은 지식을 소유한 이들과 교류하다 보면, '역사화를 아름답게 구성하려 할 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알베르티가 보기에 "아름다운 창안은 그림으로 그려지기 이전 상태의 창안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지의 아름다움은 이미 텍스트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됩니다. 피디아스도 시인 호메로스에게 배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ART > 서양미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알베르티의 ‘올바른 구축’과 르네상스 회화의 새로운 시선 (0) | 2025.10.13 |
|---|---|
| 르네상스의 눈: 알베르티와 시각 피라미드 (0) | 2025.10.13 |
| 실재와 환상 — 중세의 눈으로 본 세계, 그리고 그 너머 (0) | 2025.10.13 |
| 상징과 알레고리의 세계 — 중세 예술이 말하는 ‘보이는 것 너머의 의미’ (0) | 2025.10.12 |
| 형(形)에서 빛(光)으로: 플로티노스에서 시작된 중세의 미학 (0) | 2025.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