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서양 미학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전환점을 만든 플로티노스(Plotinos) 와 그의 사유, 그리고 그것이 중세 건축과 예술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비례의 미학’에서 시작해,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빛의 미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단순한 철학적 변화가 아니라, 예술의 본질을 뒤바꾼 거대한 흐름이었습니다.
형태에서 빛깔로 - 플라티노스의 등장
고대 그리스 예술에서 미는 수학적 비례와 조화의 산물로 여겨졌습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우주 자체를 ‘숫자의 조화’로 이해했고, 플라톤 역시 “아름다움은 비례의 완전함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의 ‘카논(canon)’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는 인간 신체 각 부분의 이상적 비율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며 형태의 완벽함이 곧 미의 기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고대의 미는 ‘이성적 질서’에 기반한 '형식적 정의'의 산물이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오면 신체의 이상적인 비례관계(=카논)을 확정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에 변화가 생깁니다. 그 변화 당시를 지배하던 신플라톤주의의 정신적 분위기와 관계가 있다. 가령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이상적 형태가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플로티노스(Plotinos, 205~269?)는 '일자'를 무엇보다도 빛으로 표상했습니다. 즉 만물에 미를 부여하는 원리가 형(形)에서 빛(光)으로 바뀐 것입니다.
빛은 부분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따라서 거기에 수적 비례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미란 무엇보다 '질(質)'의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미가 수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견해를 미에 대한 '형식적 정의'라고 합니다. 반면 미의 본질을 수량화할 수 없는 어떤 질적 특성에서 찾는 견해를 미에 대한 '실질적 정의'라고 부릅니다. 한마디로 헬레니즘 시기에 들어와 미의 관념이 형식적 정의에서 실질적 정의로 바뀐 셈인데, 이는 미적 관념의 역사에서 실로 혁명적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로티노스가 도입한 이 새로운 정의가 훗날 중세 문명의 미감을 결정하게 됩니다.
플라티노스의 반론
플로티노스가 《에네아데스》1권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미가 비례에 있다면, 부분이 있는 대상만 아름다워야 한다. 하지만 부분들은 더 작은 부분으로 나뉠 수 있지만, 어느 심급에선가는 단일체여야 한다. 단일체는 비례가 없고, 따라서 아름다움도 없다."
즉 그것들은 추하다. 하지만 (전체의) 아름다움이 (부분들의) 추함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에 미에 대한 형식적 정의는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오류논증입니다. 쓰레기로도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 있기때문이죠. 하지만 이 오류논증과 더불어 서구의 미학에는 단절이 일어납니다. '형'이 아니라 '빛'에서 미를 찾는 생각은 기독교의 미학이 되어, 중세 천년을 지배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플로티노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여전히 고전기의 그리스 예술을 좋아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에 맞서 고대의 세속주의를 옹호하려 했던 플로티노스의 생각이 정작 그의 적대자들에게 계승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례, 원인인가 결과인가
중세인의 눈은 현세보다 내세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감각적 세계가 아니라 초월적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그 바탕에 신에게서 흘러나오는 빛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고대의 형식적 정의를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것을 상대화했을 뿐입니다. 즉 중세에 비는 미의 '원인'이 아니라 그저 '결과'일 뿐이었던 것이죠.
가령 여기에 꽃잎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 꽃잎은 왜 예쁜가?'라고 물으면, 고대인들은 꽃잎의 가로와 세로의 황금비를 가리키며 그것이 아름다움의 '원인'이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대인들은 이 대답에 만족했을 것입니다. '비례는 왜 아름다운가?' 그리고는 비례가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 바탕에 초감각적인 빛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에는 비례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햇빛, 달빛, 번개, 노을, 타오르는 불, 번쩍이는 황금과 보석의 빛 등, 세상에 비례 없이도 아름다운 것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이 모두는 감각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감각적 세계가 아니라 초월적 세계에서 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초월적 빛이 감각의 세계에 들어와서, 비례 또는 광휘와 같은 눈에 보이는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재료의 미학
어느 시대나 예술에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담게 마련입니다. 감각적 세계보다 초월적 세계를 중시한 중세에는 예술로 감각적 세계를 재현하기보다는 그 너머의 초월적 세계를 표현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 초월적 빛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습니다. 신학자들이야 그 아름다움이 '초월적'이라는 말로 때우면 그만이었지만, 장인들은 처지가 그렇게 한가롭지 못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빛을 눈에 보이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보이게 할 수 있단 말일까요? 중세의 장인은 그 과제를 재료로 해결했다. 즉 값비싼 재료의 찬란한 색채와 광휘를 그 초월적 빛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다. 중세의 공예는 온통 번쩍이는 황금, 은은하게 비치는 은빛, 형형색색의 보석, 몽환적 효과를 내는 다양한 색깔의 희귀한 염료 등으로 뒤덮여 있었다. 중세의 공예를 뒤덮는 보석과 귀금속은 무엇보다도 그 황홀한 빛과 색의 효과로 감각 세계 너머의 초월적 세계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중세 예술의 가장 중요한 상징 작용은 '형식'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중세에 제작된 성물함을 보자. 우리는 거기에 새겨진 것이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이며 두 천사를 거느린 예수라는 것을 알고 있죠. 하지만 이런 '내용'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형식'입니다. 인물상은 황금으로 만들어졌고, 상자는 형형색색의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중세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이 형식에, 황금과 보석이 내뿜는 광휘에 있습니다. 물질은 빛나면서 초월적 빛을 상징합니다.
값비싼 재료에 대한 취향은 어쩌면 발달하지 못한 미감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중세 문명을 담당한 것은 그리스나 로마인들이 한때 '야만인'이라 불렀던 민족들이다. 《서양 중세 문명》의 저자자 자크 르 고프에 따르면, 중세의 재료 취향은 이 미개함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하긴, 졸부들은 일단 온을 귀금속과 사치품으로 처바르고 보지 않던가요. 물질에 대한 저급한 욕망 속에 빛나는 초월에 대한 고상한 열정. 중세 예술의 매력은 어쩌면 이 모순성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빛의 상징주의
이미지는 형태 색채의 두 요소로 이루입니다. 중세 예술의 효과는 역시 강렬한 색채 효과에서 온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라벤나를 방문하여 그 유명한 '두오모'를 찾는다고 하자. 성당 벽에 들어가는 이들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곧바로 색채의 공습에 노출됩니다. 벽면 전체를 장식하는 모자이크의 화려한 색채가 머리 위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면, 방문객들은 형태를 인지할 틈도 없이 원색의 물결을 뒤집어쓴 채 한동안 그 자리에 멈 서게 됩니다. 이 정도면 거의 '색채의 폭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중세의 색감은 르네상스와 달랐습니다. 근대 회화는 가시적 세계의 재현을 목표로 삼았기에 실제 사물의 색을 그대로 본뜨려 했습니다. 로마네스크의 모자이크, 고딕의 스테인드글라스의 색깔은 그와 다릅니다. 가령 야곱을 묘사한 유리창을 보자. 빨강, 파랑, 노랑, 하양, 검정으로 원색에 가까운 구성입니다. 설사 녹색이나 보라 등의 혼합색이 나타난다 해도, 그것은 물감을 섞어 만든 혼탁한 색이 아니라 채도가 높은 보석의 원색에 가깝습니다. 빛의 미학은 '명료함'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빛의 상징주의는 건축에 있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대표하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을 보자. 모자이크로 장식된 벽이 온통 금박으로 번쩍거리며 초월적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고딕 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흘러드는 자연광을 이용합니다. 그 물결은 방문객을 지상에서 천국으로 끌어올립니다. 모자이크의 황금빛 광채든, 색유리를 통과한 자연광의 광휘든, 감각적인 재료로 만들어낸 몽환적 분위기로 초감각적 세계를 연출한느 것이 중세 예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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