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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서양미술사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비례론의 변천과 의미

by artzip603 2025. 9. 25.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비례론의 변천과 의미

중세의 제작적 비례와 오네쿠르

서양의 중세에 들어서면 비례론은 고대와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흔적을 우리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빌라르 드 오네쿠르(Villard de Honnecourt)가 남긴 앨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건물을 짓 장인으로 여겨졌지만, 최근 연구는 그를 장인이라기보다는 중세 장인들의 작업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한 관찰자(딜레탕트)로 해석합니다. 그가 남긴 양피 앨범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당시 장인들이 어떤 도구와 원리를 사용하여 이미지를 만들었는지를 상세히 보여주는 일종의 ‘교본’이었습니다.

추상에서 구상으로 나아가는 작업

중세 장인들이 인체를 묘사할 때 제작적 비례를 따랐습니다. 그들은 먼저 자와 컴퍼스를 이용해 기하학적 도형을 그린 후, 그 위에 구상적 형태를 붙여 나가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예를 들어 얼굴을 그릴 때는 세 개의 동심원을 먼저 그려 윤곽을 잡고, 몸통과 팔다리는 별 모양이나 십자가, 또 머리 부분은 원과 십자가를 활용해 구성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완성된 인물상은 현실의 생생한 움직임보다는 영적인 분위기와 상징성을 더 강하게 풍기게 됩니다.

이러한 제작 과정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오히려 현대 그래픽 디자인의 평면적 구성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현대 화가들이 구상에서 추상을 끌어낸다면, 중세 장인들은 반대로 추상에서 구상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삼각형은 말의 머리가 되고, 삼각형들의 연쇄는 개가 되며, 원호는 두마리의 학이 되며, 별 모양은 날개를 펼친 독수리로 변환되는 식입니다.

빌라르 드 오느쿠느(오네쿠르) 1235년 경

기하학적 프레임의 의미

이런 기법은 단순히 상징적 이유만이 아니라 실용적인 편의성도 있었습니다. 기하학적 프레임을 익히면 그림 실력이 부족한 사람도 일정한 형태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경우 있으니까요. 따라서 오네쿠르의 앨범은 제작적 비례에 따라 만들어진 이미지이기 때문에 '소묘' 라기보다는 '구성' 에 더 가깝고, 이는 오늘날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도안집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인들은 현세의 가시적 세계의 생생한 묘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감각적 세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였습니다. 그렇기에 고대의 객관적 비례는 무시되고, 오히려 추상적이고 규범적인 제작적 비례가 채택된 것입니다.

신학과 비례론의 배경

중세의 신학자들은 우주와 인간 사이에 신이 정해놓은 조응 관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즉, 인간 신체의 비례는 단순한 신체적 특징이 아니라 우주적 질서(천체의 운항)와의 연결을 보여준다고 여겼습니다. 거대한 우주(마크로코스모스)와 인체 혹은 교회 건축물(마이크로코스모스) 사이에 조응관계가 있다 사고방식은 중세 사상 전반에 깊이 스며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장인들에은 학자들이 말하는 이런 철학적이고 심오한 이론을 이해하기에는 교양이 모자랐기 때문에, 쉽게 작업하고 규범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중세의 비례론은 예술적 실천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장인들은 대부분 익명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와 객관적 비례의 부활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술이 단순한 장식이나 기술을 넘어, 자유학예(artes liberales)라는 학문적 위상을 얻게 되면서, 장인들이 '예술가'가 되어 당대의 모든 지식을 제것으로 만들려 노력하며, 사회의 정신적 엘리트들이 예술작품을 세계관을 구현한 정신적 구조물로 보기 시작합니다. 즉, 비로소 예술이 적용된 비례론이 심오한 우주론적-조화론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고대의 객관적 비례가 다시 부활했습니다.

르네상스 초기의 학자들은 고대 문헌 속 비례의 '이론'을 탐독했지만, 우주론적 성격을 띤 비례론은 인체의 실측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비례론에 대한 관심이 깊을수록 외려 실제 인체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는 역설적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티와 다 빈치는 실제 인체에 대한 관찰과 측정으로 비례론을 경험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알베르트와 다 빈치의 혁신

알베르트 역시 초기 르네상스 저자들처럼 "신장이 발 길이의 여섯배에 해당한다."는 비트루비우스의 이론에서 출발했지만, 다른 저자들과 달리 그 실제 인간의 신체를 직접 관찰하고 측정하여 새로운 기준을 세웠습니다. 그는 신장 600단위로 나눠 정밀하게 분석했는데, 이를 엑셈페다(Exempeda)라 불렀습니다. 거기에 따르면 인체는 6페데스(피트)=60운체올레(인치)=600미누타(1/10인치)로 이루어져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측정방법을 '심화'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영역을 '확장'하는 방을 취했습니다. 그는 가능한 많은 사람의 신체를 기록하여, 그 속에서 공통되는 이상적 비례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결과가 바로 유명한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입니다. 아름다움을 자연스러움과 동일시하며 실제 인체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이상적 비례에 도달하려한 노력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에서 인간을 둘러싼 동그라미와 정사각형을 통해 다 빈치가 여전히 신비주의적 비례론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례론이 중세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신비주의와 경험과학의 결헙이 깨져야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뒤러의 종합과 근대적 전환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알베르트와 다 빈치의 방법을 종합했습니다. 그는 알베르티의 엑셈페다를 받아들여 1/600단위를 다시 1/3으로 나누어 비례 측정을 극도로 정교하게 다듬으면서도, 다 빈치처럼 다양한 체형을 관찰하여 인체 비례 26가지 유형을 정리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하나의 절대적 비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로써 비례론은 중세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완전한 근대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비례론은 이제 이상적 비례의 추구라는 신비주의적 목표에서 벗어나 철저한 경험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마니에리스모와 비례론의 쇠퇴

뒤러에게서 비례론은 창작을 위한 방법론의 수준을 넘어 아예 자기 목적이 되었고, '비례론을 위한 비례론'의 연구로 치달았습니다. 그의 비례론은 창작의 실천에서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이렇게 비례론은 근대성에 도달하자마자 창작의 방법으로서는 죽을 맞기 시작했습니다. 르네상스가 끝나고 마니에리스모에 이르면, 비례론의 예술적 효용 역시 의문에 부쳐지게 됩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파르미잔니노나 엘 그레코의 작품을 보면 마니에리스모의 신체는 8등신, 9등신을 넘어 12등신에 이르는 기형적 형태를 하고 있고, 이는 회화에 대한 관념이 객관적 표현보다 예술가의 주관적 표현이 중시되었다는 것입니. 이로써 르네상스 시대까지 절대적 의미를 가졌던 비례론은 더 이상 필수적인 규범이 되지 못했습니다.

현대 예술에서의 비례론

오늘날 비례론은 예술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대신 건축이나 산업 디자인 같은 분야에서 여전히 활용됩니다. 예컨대 근대 건축의 거장인 르 코르뷔지에는 인체를 기준으로 건축을 설계했으며, 샤도가 예견했듯이 공업 생산에서는 제품 제작에 인체 표준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이는 '이상적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능적·실용적 목적'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현대 예술에서 미학적 차원의 비례론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굳이 남아 있다면, 아마도 대중들이 스타들의 신체 비율을 논하며 ‘이상적인 몸매’를 이야기하는 일상 속 풍경이겠지요.

맺음말

중세에서 르네상스, 그리고 근대에 이르는 비례론의 변화는 단순한 도상의 문제를 넘어,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반영합니다. 기하학적 추상에서 출발한 중세, 실제 인체 관찰을 강조한 르네상스, 그리고 주관적 표현을 중시한 마니에리스모까지—비례론의 역사는 곧 서양 예술관의 역사입니다.